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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월정사, 상원사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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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0. 23.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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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만의 월정사, 상원사 탐방




1977년 직장상사 및 과 직원들과 함께 오대산을 등산하면서 월정사와 상원사, 적멸보궁을 스쳐 지나갔는데, 절간에 얽힌 설화들은 물론 형태조차도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이번 탐방 길에 그 당시 함께하였던 동료와 동행하게 되어 옛 이야기를 꺼냈더니 본인도 맞장구를 친다. 버너에 코펠이며 쌀과 부식을 배낭에 넣어 울러 메고 땀을 흘렸을 것이란다. 이번 탐방에 함께한 직장 OB모임의 원로선배는 점심시간에 선우휘선생의 ‘상원사’란 단편소설 얘기를 하시면서 6.25 전란당시 상원사가 불타지 않은 것은 한 젊은 장교의 기지덕분이란 얘기를 해 주시길 레, 돌아와 도서관에서 선우휘의 소설집 《쓸쓸한 사람》(문학사상사 刊)에 수록된 實話小說 <上院寺>란 소설을 읽었다. 





『6.25 전란 중 명 지휘관이었던 김 장군은 중공군이 진격해오자, 법당앞에서 부하장교 등이 기도 중 법당에 숨은 적의 저격으로 사망한 일, 유서깊은 사찰에 숨은 적과 교전 중 포탄을 사용치 못하고 소총을 사용하여 다수 사상자가 발생하였던 전투가 떠올라 사찰을 불태우란 지시를 내려 월정사는 완전히 불탔는데, 이로 인해 월정사 스님들은 김 장군을 원망하고 저주하고 있었다. 한편 상원사로 명령을 집행하러 간 소대장 김 소위는 주지 한암(漢岩)스님이 가사를 걸치고 법당에서 “나야 죽으면 어차피 다비(茶毘)에 붙여질 몸이니 내 걱정은 말고 어서 불을 지르시오”라면서 절을 불태우라고 하자, 문짝을 뜯어 마당에서 불을 태우고 떠나는데, 부하들이 법당을 불태우지 않는 것은 명령위반이라고 하자 “나는 사람을 태우라는 명령을 받지는 않았어. 하여간 태운 건 태운 거다.”라면서 상원사를 떠날 것을 명령하여 사찰이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한암 주지스님 얘기는 상원사 계시판에도 사진과 함께 소개되어 있었다.










사전에 방문예약을 하고 가 월정사 일주문을 지나니 문화유산해설사가 내려와 2006년 쓰러졌다는 수령 600년의 전나무부터 해설을 들으며 올라갔다.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는 두 번이나 월정사를 다녀갔는데, 조정에서는 숭유억불정책을 썼으나 개인적으로는 절을 찾아 심리적 부담감을 달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설명이었다. 또 세조가 상원사 文殊殿에 들어가려니 고양이가 옷깃을 물자 법당을 수색하여 자객을 찾아내 생명을 구하게 되었는데, 문수전 앞에는 이를 기리는 고양이 석상이 있으며, 묘전(猫田)까지 하사하였다고 한다. 월정사는 젊은 연인커플들이 많이 찾아 연도에는 자연설치미술을 설치해 놓기도 하였는데, 특히 강희준의 <젊은이를 위한 팡파레>는 길섶에서 단풍과 잘 어우러졌다. 천왕문에는 포대화상을 비롯한 벽화들이 그려져 있는데, 월정사의 여러 殿閣들은 6.25때 소실된 후 1964년에 본전인 적광전(寂光殿)이 한진그룹의 후원으로 중건되면서 점차 가람이 복원되었다고 한다(천왕문 우측에 조중훈 회장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천왕문을 들어서니 좌측에 선홍빛의 단풍나무가 일행을 반기고 있었으며, 누각 밑의 나지막한 금강문을 지나니 국보로 지정된 팔각구층석탑이 적광전 앞에 우뚝하니 세워져 있었다(해설사는 포토존이라면서 탑 정면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라 했으나 나온 사진을 보니 적광전 현판이 가려져 결코 좋은 장소가 아니며 오전 오후 시간대에 따라 현판이 나오도록 비스듬히 찍는 것이 좋을 것이다).















1987년 국립지리원이 태백산의 검룡소를 한강의 발원지로 인정하기 전까지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 《택리지》 등에서 한강의 발원지로 인정되었던 우통수(于筒水)에서 내려오는 내(川) 물이 모인 금강연 위를 가로 질러 놓인 금강교를 건너 버스에 승차하여 한참을 가니 상원사에 다다랐다. 해설사는 가는 길 새의 <선재길>이 오대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풍길이라고 추천하였는데, 시간도 없고 빗방울도 떨어져 차안에서 우의를 입거나 우산을 든 탐방객들만 마주치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상원사로 오르는 입구 오른 편 바윗돌에는 五臺山上院寺, 寂滅寶宮, 文殊聖地가 음각되어 있었으며, 왼편에는 관대걸이 석조물이 세워져있는데, 세조가 상원사에 오르는 길에 관대걸이에 의관을 걸어두고 개울물에 목욕을 하던 중 동자승이 나타나 등을 밀어 달라 하였는데, 목욕 후 동자승에게 “너, 어디 가서든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고 말하지 말라.”고 부탁하자, 동자승도 “대왕도 어디 가서 문수보살이 등을 밀어주었다고 말하지 마시오.”하면서 사라졌는데, 이후 몸에 난 종기가 모두 살아졌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상원사의 동자좌상 안에서 세조의 딸인 의숙공주의 발원문을 비롯한 복장유물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전설로만 치부할 수 없기도 하다.). 조금 더 오르니 ‘번뇌가 사라지는 계단’이 나타나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상원사가 나타난다. 문수전 앞 탑 주위 보호철책에는 건강과 성공, 고시합격, 혼사 등 각종 소원을 비는 소원지들이 걸려 있었다. 국화분이 놓여 있는 문수전 계단 왼편에는 고양이 상이 서 있는데, 석상을 만지면 소원이 성취된다고 하여 방문객들의 손을 타 뭉퉁한 돌덩이가 되어 버렸다. 법당 안으로 들어서니 보존 유리관 안에 국보인 목조문수동자좌상(木造文殊童子坐象)과 보물인 목조문수보살좌상(木造文殊菩薩坐像)이 모셔져 있었으며, 나를 포함한 몇 명의 회원들이 참례하였다. 기념품점 옆의 지혜수에서 물을 마신 후 국보가 모셔진 범종각으로 가니 국보인 동종은 보존각안에 모셔져 있고 사용하기 위해 새로 종을 만들어 매달아 놓고 있었다. 세조가 승하하자 1469년 예종은 전국에 수소문하여 신라 성덕왕 24년(725년)에 주조되었고 안동 어느 사찰에 있던 종이 안동누각에 달려 있음을 알고 왕명으로 이 종을 아버지와 인연이 있던 상원사로 옮겼다고 한다. 종이 죽령을 넘어 올 때 움직이지 않자 유두를 하나 떼어 안동으로 보냈더니 움직였다는 설이 있는데, 함께 간 동료들과 확인해보니 정말 유두하나가 떨어져나가고 없었다.(유리관 속에 있어 사진은 찍을 수 없었다) 상원사 마당에는 금빛 찬란한 봉황이 솟대위에 안장되어 있는데, 언제, 어떤 의미에서 설치했는지에 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상원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殿이나 閣보다 우위인 부처님 진신 사리를 모신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있는데, 해설사는 사리가 宮 안에 모셔진 게 아니라 인근 어디엔가 모셔져 있으니 그냥 그렇게 믿으면 된단다. 시간관계상 들리지 못했는데, 여유를 갖고 다시 한 번 역사공부를 한 후 찾아야겠다. 1999년 첫 번째 배로 금강산 여행을 다녀 올 때는 정말 열심히 책을 읽고 갔었는데, 이후엔 늘 가기 전에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실천하지 못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어느 선배의 세종시대 얘기를 듣고는 해박한 지식에 정말 깜짝 놀랐으며, 역사나 문화에 관해서는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함을 절감하였다.


오대산 단풍 포스트 : http://blog.naver.com/hlp5476/220842655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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