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매일신문] [장갑수와 함께 걷는 길] 오대산 선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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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8-12-05 08:42 조회1,574회 댓글0건본문
스님들이 걸었던 옛길은 ‘깨우침과 치유의 길’이 되고
월정사 일주문부터 1㎞ 남짓 이어지는 아름드리 전나무 1천700여 그루가 만든 전나무숲은 걷기 좋은 아름다운 숲길이다. |
강원도 평창은 오대산, 황병산, 계방산, 백석산, 발왕산 등 1천m가 넘는 고산준봉이 즐비한 고장이다. 수많은 산 중에서도 평창을 대표하는 산은 오대산이다. 설악산이 빼어난 미모를 갖춘 산이라면 오대산은 넉넉하고 깊은 맛을 자아내는 산이다. 주봉인 비로봉을 비롯해 호령봉, 상왕봉, 두로봉, 동대산 등 다섯 개의 봉우리가 편편한 누대를 이루고 있어 오대산이란 이름을 얻었다.
다섯 봉우리에는 중대 사자암, 북대 미륵암, 서대 염불암, 동대 관음암, 남대 지장암 등 다섯 암자가 둥지를 틀었다. 그래서 오대산에 들면 부처의 향기가 넘쳐흐른다. 오대의 다섯 암자를 거느리고 있는 유서 깊은 사찰이 있으니 월정사와 상원사다. 오랜만에 월정사와 상원사를 찾는다.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의 옛길을 따라 걷기 위해서다. 이름 해 ‘오대산 선재길’이다.
월정사 일주문 앞에 서서 몸매를 가다듬는다. 일주문에 들어서자 전나무숲길이 시작된다. 일주문부터 금강교까지 1㎞ 남짓 이어지는 아름드리 전나무 1천700여 그루가 월정사로 가는 범부들을 부처의 세계로 안내한다. 이곳 전나무는 수령이 대체로 90년 가까이 되지만 370년에 달하는 아름드리 전나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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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명은 태어남과 죽음이 있듯이 전나무도 수명을 다해 밑줄기만 남아있기도 하다. 쓰러진 나무줄기를 이용해 곳곳에 조각을 해놓으니 살아있는 조각공원 역할도 한다. 울창한 전나무 숲에는 지혜의 빛처럼 가느다랗게 햇볕이 스며든다. 그 빛이 우리를 깨우침의 길로 인도한다.
전나무숲길을 지나 천왕문에 익살스러운 모습의 호랑이상이 정겨움을 더해준다. 절 마당으로 들어서니 팔각구층석탑과 적광전 등 주요 당우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월정사 법당인 적광전 앞에 부처님을 상징하는 고려시대 석탑인 팔각구층석탑(국보 제48호)이 서 있고, 석조보살상(국보 제48-2호)이 팔각구층석탑을 향해 오른쪽 무릎을 꿇고 왼쪽 다리를 세워 옆에서 보면 마치 탑을 공양하거나 경배하는 것 같은 모습이다.
월정사에 올 때마다 나는 조지훈의 시 ‘승무’(僧舞)가 생각난다. 1941년 혜화전문을 졸업한 시인 조지훈은 이곳 월정사에서 참선하면서 강원 외전강사로 상당기간을 보냈다. ‘승무’는 조지훈 시인이 월정사에 머무를 당시 쓴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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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를 출발해 오대천을 따라 걷는다. 11월의 오대천은 이미 단풍은 지고, 낙엽송만이 붉은 빛을 띠고 있다. 스님들이 천 년 넘게 걸으며 깨달음을 얻었을 옛길은 선재길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 생활에 지친 영혼들을 보듬어준다. 그래서 선재길은 ‘깨달음과 치유의 길’이다. 울창한 아름드리나무들이며 티 없이 맑게 흐르는 계류는 탐욕과 어리석음을 가득 안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보살처럼 다가온다.
지장암 근처를 지날 때에는 지장폭포라 불리는 폭포가 지장보살인양 하고, 골짜기를 따라 유유히 흘러오는 명경지수는 관세음보살처럼 자비롭다. 낙엽을 떨군 활엽수들은 ‘나’라는 아집을 벗어던지고 깨달음을 얻은 선지식 같다.
주변은 단풍이 져서 화려하지는 않지만 나를 바라보며 걷기에는 오히려 좋은 조건이다. 나목 상태 숲은 ‘텅 빈 충만’을 느끼게 해준다. 더군다나 단풍절정기를 지나니 걷는 사람이 적어 한적하고 고요해서 포행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오대산의 산세가 부드럽고 포근한 것처럼 계곡도 어머니의 품처럼 푸근하다. 티 없이 맑은 물은 우리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다. 물가 바위에 앉아 맑고 청아하게 흐르는 물소리에 귀를 씻으며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부부의 모습도 이미 계곡의 일부가 됐다.
길은 여러 차례 계곡을 건넌다. 계곡의 바위와 돌은 헤아릴 수 없는 세월동안 흐르는 물이 갈고닦아 반들반들해졌다. 이렇듯 오대천의 바위와 돌 하나하나는 세월이 만든 조각품이다. 고요한 산속의 적요함이 깨질세라 걷는 사람들도 목소리를 낮춘다. 정신을 집중하지 않아도 그저 걷는 것만으로 자연스럽게 명상이 된다.
요즘 보기 힘든 다리 하나를 만난다. 통나무로 기둥을 박고 그 위에 잎나무, 잔가지와 흙을 얹어 만든 섶다리다. 섶다리는 옛날 물이 얼어 나룻배를 띄울 수 없는 겨울을 나기위해 주민들이 울력을 통해 만들었다. 겨울이 지나고 이듬해 여름철 홍수로 무너지면 다리는 수명을 다한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산간지방에서는 섶다리를 볼 수 있었으나 요즘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섶다리는 잔가지위에 흙을 얹기 때문에 흙다리라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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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오대천에는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다리인 징검다리도 그대로 남아있어 정감을 더한다. 원시적일수록 인간 친화적이라는 사실은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충분히 유추해볼 수 있다. 오대산장을 지나자 오솔길은 더욱 좁아지고 깊어진다.
가끔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유난히 부부가 많다. 다정하게 걷거나 의자에 앉아 정담을 나누는 모습이 선재길의 의미를 더욱 높여준다. 계곡은 점점 규모가 작아지고, 원시적인 느낌은 더해진다. 오대천에 놓인 마지막 다리를 건너 상원사로 향한다.
상원사 입구 주차장에서 상원사로 오르는 길에도 전나무를 비롯한 아름드리나무들이 방문객의 마음을 정갈하게 해준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긴 계단을 따라 올라서니 높은 축대 위에 상원사가 동대산을 바라보며 앉아있다. 절 마당에 들어서니 밀려오는 산중풍경이 파도치듯 율동적이고 적막감이 들 정도로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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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신앙의 중심지인 상원사는 ‘ㄱ’자 형태의 문수전이 법당이다. 문수전에서는 문수동자를 조각한 목조문수동자상(국보 제221호)이 문수보살상과 함께 지혜의 빛을 전해준다. 문수전을 참배하고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신라 성덕왕 24년(725) 만들어진 상원사동종(국보 제36호)을 찾는다. 동종에 조각된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상과 당초문은 최근에 만든 것처럼 생생하다. 맑고 고운 동종소리는 수많은 세월 동안 저 산줄기를 타고 세상에 전파됐을 것이다.
많은 산중사찰들이 한국전쟁 당시 불타 없어졌는데, 상원사가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던 데에는 당시 74세의 한암 스님의 기개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노스님이 법당에 앉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절에 태우려면 나와 함께 불을 지르라”고 버티자 지혜로운 지휘관은 요사채의 문짝 두 개와 장작 몇 아름을 마당에 쌓아놓고 불을 지르고 퇴각했다. 본사인 월정사는 석조물을 제외하고는 전소되고 말았는데, 상원사는 한암스님의 살신성인으로 화재를 피해 문수동자상과 동종과 같은 문화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상원사에서 내려오는데, 계곡의 물소리가 맑고 청량하게 들려온다. 맑고 시원한 물소리가 집착하지 말라는 스님의 설법으로 들려온다.
※여행쪽지
▶오대산 선재길은 지금과 같은 도로가 생기기 전 월정사와 상원사를 잇는 옛길로 오대천을 따라 걷는 길이다.
▶코스 : 월정사 일주문→월정사→회사거리→섶다리→오대산장→상원사(10㎞/3시간30분 소요)
▶월정사 아래 식당가에는 산채정식, 황태구이정식, 산채비빔밥을 하는 식당들이 많다.